나는 별로 독서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공릉동 서울공대 시절 라면가게에서 만화와 무협지를 읽는 수준이었다. 당시 남학생 밖에 없고 사대문에서 멀리 떨어진 이 학교에서 유일한 낙 중의 하나는 만화를 읽고 낄끼덕대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에서 고분자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할 때도 계속되었다. 인스트론이란 기계를 사용해 인장강도 측정 실험을 하는데 어떤 샘플은 2 시간 가까이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시간 동안은 자리를 뜨기도 어려웠다. 무언가 시간을 죽일 도구가 필요했고 그 때 가장 많이 본 책이 김용이란 대만 사람이 지은 영웅문 같은 무협지였다. 덕분에 지금도 관련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운기조식, 명불허전, 초식, 무림의 고수 등등이 그것이다.
본격적으로 독서에 재미를 들인 것은 대우 시절이다. 21세기 경영자 과정이란 단기 MBA 과정에 있었고 거기에 뽑힌 나는 주로 일본인으로 구성된 (당시는 일본이 최고로 강했다) 선생들 밑에서 낮에는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책을 읽는 생활을 했는데 그야말로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뜰 수도 있었고, 회사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얻을 수도 있었고, 지금의 문제를 어떤 맥락에서 봐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노하우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읽고 감명을 받는 수준이었다.
다음 단계는 컨설팅 회사에 근무할 때 일어났다. 그 회사에는 경영학 관련 책과 강연 테이프가 엄청 많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하다 온 내게는 은혜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새로운 업계에 들어와 어떻게 일을 해야 할 지, 무슨 공부를 할 지 모르는 나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거기 있는 모든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집은 일산이고 회사는 워커힐 근처라 전철로만 꼬박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하루에 한 권 이상은 거뜬히 읽을 수 있었다. 읽기가 지겨우면 강연 테이프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은 필요에 의해 책을 많이 읽었고 주로 경영학 관련 책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서방법에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저 책을 읽고 중요 대목을 메모해 두는 수준이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한경 비즈니스에 경영 컬럼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공식적으로 글을 쓰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사실은 내가 정말 무식하다는 것이었다. 망신 안 당하기 위해서라도 체계적인 지식의 흡수와 소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독서란 필요성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저 막연히 독서가 몸에 좋다는 수준에서 책을 읽기에 현대 생활은 너무 바쁘고 다른 유혹과 자극이 많다.
책은 가리지 않고 읽는다. 처음에는 경영관련 책을 많이 읽었지만 차츰 역사, 사회학, 심리학 등으로 폭이 넓어진다. 마음이 가는대로 책을 사서 읽는 편이다. 물론 그 때 그 때 필요성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성공 관련 책을 집필할 때는 개인의 휴먼스토리에 관한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 커뮤니케이션 책을 쓸 때는 그쪽 관련 책을 50권 정도 사서 읽었다. 행복한 중년에 관심을 가질 때는 그 분야 책을 집중적으로 구하게 된다. 그렇지만 한 권을 집중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20권 정도의 책을 늘어놓고 본다. 그 중에서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다. 늘 가방에는 몇 권의 책을 넣고, 소파 주변, 침실, 화장실, 학교 서재 등에 책을 놔둔다. 그러다 보면 결국 안 읽고 지나가는 책도 생긴다.
책을 읽는 순서는 이렇다. 처음에 책을 사면 일련 번호가 매겨진 독서리스트에 책 제목, 저자, 출판사 등을 기록한다. 그리고 서문과 결론 부분을 먼저 읽어 전체적으로 이 책이 어떤 책이란 것을 파악한다. 그 때 많은 결정을 한다. 이 책은 잘못 산 것 같다는 판단도 내린다. 어떤 책은 몇 장 읽다 그 수준에서 그친다. 어떤 책은 전체적으로 훑으면서 그 내용을 살핀다. 잘 샀다는 느낌이 오는 책은 뭔가 다르다.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오는데 이런 책은 맛난 음식을 먹을 때처럼 아껴서 두고두고 읽는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소개할 책은 신중하게 고르고 한자한자 정독하며 읽는다. 책 마다 읽는 방법, 시간 등을 달리하는 것이 내 독서 방법이다.
책을 읽은 후에는 반드시 독서관련 요약을 한다. 책 이름을 쓰고, 밑줄 친 부분을 옮겨 적고, 간단한 소감이나 시상 등을 기록한다. 나중에 이 파일을 열면 예전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 살아난다. 내 가장 큰 재산 중의 하나가 바로 독서관련 요약이다. 이 요약은 다시 이슈 별로 재정리를 한다. 예를 들어, 겸손이란 항목의 지식 창고가 있는데 책을 읽다 겸손 관련 사례나 격언이 나오면 그 창고에 보관해 둔다. 물론 정리는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넣어둔다. 이 지식 창고는 가끔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방송이나 어떤 기업에서 요구할 때가 그렇다. 이 창고를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그 이슈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기도 한다.
독서는 내 생활이고 생계를 유지수단이자 가장 큰 즐거움이다. 좋은 책을 샀을 때의 기쁨,좋은 책을 읽을 때 온몸에 전해오는 쾌감, 이를 요약하고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고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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